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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철학, 역사, 문학

북학의

by 호잇호잇__ 202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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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북학의

 

목차:

책머리에

서문 1: 서명응
서문 2: 박지원
서문 3: 박제가 자서

 

북학의 내편
수레/ 배 / 성 / 벽돌 / 수고/기와/ 자기/ 삿자리/ 주택/창호/ 뜰 / 도로/ 교량/목축/ 소/ 말/ 나귀/ 안장/구유통/ 시장과 우물/ 장사/ 은/화폐/ 철/ 목재/ 여자의 의복/연극/ 중국어/ 통역/ 약/장/ 인장/ 담요/ 저보/종이/ 활/ 총과 화살/ 자/문방구/ 골동품과 서화

 

 

북학의 외편
밭/ 거름/ 뽕과 과일/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 농기도서/용미차에 관한 논의/과거론Ⅰ/ 과거론Ⅱ/ 정유년 증광시에서 제출한 시사책/관직과 녹봉/ 재부론/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풍수설과 장지/ 군사를 논한다/존주론/ 북학변Ⅰ/

 

 

북학변Ⅱ /북학변Ⅲ /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

 

 

진소본 북학의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수레 9칙/ 밭/ 거름 5칙/ 뽕/농기구 6칙/ 철/ 볍씨/곡식의 이름/ 지리 / 논/수리/ 늙은 농부/ 구전/ 모내기/감자 심기/ 말리 / 유생의 도태/둔전의 비용/ 하천의 준설 2칙/창고 쌓기 3칙 / 배/ 노하운선기/’오행을 잃고 버렸다’는 데 대한 생각/번지와 허행 / 장생불사의 방법/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 재부론/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2칙/존주론

 

 

열린 사회를 위한 개혁 개방론, 박제가의 『북학의』

 

 

박제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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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북학의는 열하일기와 함께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사상가의 열망이 담겨있다. 이를 위해 시대적 배경을 선이해 하면 좋다. 조선 정조 시기에 출판된 책이다.

 

 

사실 책 내용은 크게 별 거 없다. 별거라기보다는 내게 와닿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서술형식이 단순하다. '중국(청나라)은 이러이러하다. 우리는 저러저러한 비효율적 관습이 있다. 그러하니 우리는 청나라의 방식대로 하면 좋을 것이다.'

 

둘째로, 농업국가이던 그 시대상을 도시 촌놈인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때는 성을 쌓고, 일반민은 초가집에서 살던 시기 아닌가?

 

 

 

그런 만큼 이런 시기에의 내 나름 해석과 현대사회에의 적용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하는 행태가 시대와 무관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고려시기에 서경(평양)천도운동을 생각해보자. 당시 고려 수도는 개성이었다. 묘청이 평양으로 천도하자 주장했을 때, 개경파 귀족이 반대했다. 오늘날 뭐가 다른가?

 

 

과거 어느 대통령이 서울에서 수도를 변경하려고 했었다. 이때 이해관계인들이 반대했었다. 헌법재판소도 관습법에 따른 판결로 천도하지 못하게 했었다. (양상의 유사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다) 

 

 

지금 수도권 인구 집중현상이 심하다. 수도권에 사는 인구가 그 나머지 지역보다 더 많다. 이러니 비수도권 키우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수도권의 더 많은 수의 유권자들 눈치 봐야 하는데 말이다. 공기업들 지방으로 이전하고 해도 실상 쉽지 않다. 저 때 천도했으면 혹시 모른다. 지금보다는 나았을지도 (내 생각이다). 

(물론 인구분산은 천도만으로 해결될 단순 문제가 아니다.)

 

 

시기에의 해석: 시대 가치관의 한계

조선 정조는 개혁군주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군주 이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은 정도전이 제도를 설계한 국가였다. 조선은 왕조였으나, 왕만의 결정으로 정사를 처리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만큼 신권(臣權)도 강한 나라였다. 정도전은 재상 제도를 주장했기도 하다. 재상은 번갈아가면서 선출되므로 암군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종(이방원)이 그를 암살하게 지시한다. 왕권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개국공신이긴 하였으나)

 

 

세종과 함께 정조는 성군으로 불린다. 활도 잘쐈으며(10발이면 10발 다맞추는 사람이었으나, 한 발은 고의로 빗겨쐈다. 인간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성리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문무일체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태종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인물이다. 탕평책 실시, 서얼에의 차별완화, 문체의 강제성 부여. 탕평책은 신하들을 균등히 등용함을 말한다. 신하 간 세력균형을 이루면 왕권 유지에 유리하다. 서얼에의 차별 완화는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취지도 있다. 신세력은 승진하고 출세하고 싶어 할 테니까 왕과 친해지려 할 것이다. 말도 잘 들을 것이고 말이다. 문체에의 강제성 부여란 문체반정 사건을 말한다.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왕이 강제로 저급한 문체 쓰지 말라고 한 사건이다. 맘에 안 드는 문체를 쓰면 급제도 못하게 했다. 핑계는 성리학 정신에 안 맞다는 입장이긴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어쩔티비'나 '꾸안꾸' 이런 말 쓰면 불이익을 주는 경우와 비슷할까.

 

 

이 책이 1778년에 나왔고, 정조는 1800년도에 승하한다. 이후에 조선은 제대로 된 개혁 없이 당파 싸움하다가 개방시기를 놓쳤다. 세계의 범 트렌드를 못 따라간 것이다. (신식군대, 민주주의 제도, 문물개방, 기술과학 중시) 그 후 일본에 병합되었다.

 

 

세계지도. 우리나라는 서양인 사이에서 은둔의 나라라고 불렸다

 

대륙에서 문명이 발생한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과학혁명이 발달하면서, 영국 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이 앞서 나갔다. 프, 독, 북유럽 등등이 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을 뒤늦게 쫓아가서 나름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런데 일본은 사실 우리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다. 우린 반도이긴 했다. 일본은 섬나라였기 때문이다. 문명 흡수가 우리보다 더뎠다.

 

오늘날 배울 점

 

도량의 통일성과 인프라 시설의 중요성.

박제가는 도량이 통일되지 못해 비균일한 재화 상태가 문제를 야기한다고 봤다. 이 자체가 비효율을 극대화시킨다.

그는 책에서 도로에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다. 도로가 없으면 재화가 운반되지 못한다.

더불어 수레 사용의 중요성도 말했다. 수고로움을 더는 기구이나,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구한말...에 온 서양인들도 똑같이 지적한다.) (이 책 나오고 나서 100년도 넘은 시기이다.)

 

유식(遊食)양반, 놀며 먹는 양반을 상업에 생산적으로 써야한다고 했다.

오늘날 관직에 뜻이 있는 공시생들을 상업이 아니라도 사회에 이롭게 써야한다고 생각된다.

 

상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화를 소통하게 하는 역할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구 3/10은 상인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사농공상이라 해서 상인을 제일 부정적으로 봤다)

 

 

성리학일변도의 문제점. 주자성리학 아니면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시기이다. 이러니 개혁이 되겠는가.

도교, 불교는 물론이거니와 양명학(중국에서 등장한 성리학의 한 분파)까지도 이단으로 몰았다.

학문적, 사상적 다양성이 위기를 극복할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실학도 수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개혁이 좀 더 용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IF는 무의미하다지만)

 

 

대한민국이 경제, 사회, 국방, 외교적으로 많이 성장했지만, 이대로 만족하면 발전은 없게 된다.

오늘날 북학의의 북이라면 어딜까? 미국, 서유럽? (비합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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